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반자이 돌격 (문단 편집) === 실패한 경우 === {{{#!folding [이미지(시신 포함) 펼치기・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4e61c37b5f57ff41dd40a0158a457530.jpg|width=100%]]}}} || || 과달카날 전역, 핸더슨 비행장 공격을 위해 마타니카우 강변에서 반자이 돌격 후 몰살당한 일본군 병사들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attachment/3531304501_7a2bb059_02.jpg|width=100%]]}}} || || 1945년 4월 3~4일 필리핀 전역 158연대 부쉬마스터스 전투단이 '자살적인 반자이 돌격'을 격퇴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Cuidado”–Take Care–Bushmaster with Bolo!(“Cuidado” -조심해-[* 연대 모토] 마체테 든 부쉬마스터다!), H. Charles McBarron 작) || 여기까지는 "사기가 낮고 훈련도가 낮은 오합지졸 적군을 상대할 때 번뜩이는 [[총검]]은 그대로 적군에게 [[멘탈붕괴]]를 준다"는 연구 결과를 증명하는 사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미군|사기도 충천하며, 보급도 잘 되고, 훈련도 잘 받은 데다가, 병력까지 많은 군대]]를 상대한 결과이다. 사실 미국은 이미 [[남북전쟁]]때부터 [[개틀링 기관총]], [[가드너 기관총]]을 전쟁에 도입했다. [[조지 S. 패튼]]은 "알량한 용기 따위 훈련된 총알 앞에 무력하다"라는 말을 했으며, 미군은 전선에 기관총 등 중화기를 최대한 동원했다. 중화민국군 상대로 반자이 돌격이 잘 통하던 것도 [[중일전쟁]] 극초반까지고, 당장 전선이 [[제2차 상하이 사변|상하이]]로 확대되면서 얘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합지졸로 매도되는 군벌군이지만 [[광서군벌]]의 [[리쭝런]], [[바이충시]] 등 능력 괜찮은 군벌들이 지휘하던 군벌군은 우수한 전과를 자랑했고, 일본의 오랜 침략과 만행으로 중국 전체도 [[반일감정]]으로 투철한 정신무장을 한 상태였다. 더욱이 [[장제스]]가 애지중지 키운 [[독일]]식 사단의 전투력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당시 독일식 훈련을 받고 독일식 무기로 무장한 장제스 직속 독일식 4개 사단과 중앙군 30만명은 개인무장으론 일본군보다 나았다. 게다가 장제스는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등의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독일 나치 정권 고문들을 초빙하여]] 군대를 강화하려고 오랫동안 노력해왔고 일본군이 공격 대상으로 삼은 상하이는 그런 장제스의 국토수호 노력의 결정체였다.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지뢰밭, 철조망, 토치카, 참호, [[Vz.26|체코제 경기관총]] 등으로 촘촘히 중무장된 '''[[우쑹 전투|우쑹 해안에 자신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도와 총검을 들고 상륙했던 일본군들은 삽시간에 십자포화 앞에서 도륙났고, 상륙 3주 후에는 상륙부대의 96%가 전투불능이었을 정도였다.]]''' 일본군은 [[상하이]]로 이어지는 뻘밭들을 자신들의 피로 메워가면서 처절하게 전진해야 했다. 상하이 전투 자체는 '중국군 중에 어느 누구도 80만 대군을 한꺼번에 지휘해본 적 없다'는 지휘 능력의 부재로 인해 결국 일본군이 이기긴 했으나, 일본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3차례나 증원군을 파병해야 했다. 흔히 손쉽게 함락됐다는 난징도 중국군은 처절히 저항하면서 일본군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입혔다. 또한 일본은 창사 공략전을 3차례나 실패했고 타이얼좡, 짜오양, 쉬저우에서는 중국군에게 참패하기도 했다. 중국 전선에서 무모한 일본군 지휘관들은 [[공세종말점]]에 도달할 때까지 돌격하다 중국군이 미리 짜놓은 팔(八)자 포위망에 걸려들어 고전하거나 엄청난 출혈을 강요받고 도로 후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때마다 전황을 뒤집어준 것은 반자이 돌격이나 그들의 중화기가 아닌 일본군의 [[항공기]], [[군함]], [[독가스]]였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고 역습한 연합군, 특히 미군과 영연방군과의 대결에서는 대부분 접근은 커녕 적 보병 얼굴도 보기 전에 중화기를 앞세운 우세한 화력에 태반이 쓸려나가고 그 다음에는 오히려 일본군이 [[멘탈붕괴]]하여 도망가서 어떻게 손써보지도 못하며 대부분 전멸했다. 보병 개인의 화력은 전쟁 내내 큰 차이가 없었지만, 분대지원화기등 중화기에서 한참 열세였던 일본군은 중화기의 화망 앞에는 걸어다니는 표적지에 불과했다. 개전 초기엔 성과가 있었다. [[미군]]과 [[네덜란드군]], [[영연방]]군은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과 중화기만을 두었다. [[일본군]] 또한 최소한의 상식은 지켜가며 야간에 경기관총이나 보병포, 척탄통 등으로 엄호하며 돌격했다. 하지만 정상적인 야습이 아닌데다가 엄연히 정규군이었던 만큼 밀리더라도 일본군에게 최대한 피해를 주며 밀려났기에 [[교환비|교전비]]는 좋지 못했으며, 순식간에 수복당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착검돌격이 중국 전선에서 잘 먹힌 가장 큰 원인은, 다름아닌 그 외에도 다른 교착화된 전선을 돌파할 수단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적던 시기였으니만큼,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 비해서 무기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중국군과의 교전에서 고전하게 되면 그 즉시 [[독가스]]를 활용한 화학 공격을 개시하거나 기갑장비를 동원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화학탄 사용이 금기시되었고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보복이 두려워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국의 경우 일본이 아무리 화학 공격을 해대도 자체적으로 화학탄을 활용한 반격을 할 능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화민국]] 또한 화학공장에서 독가스와 [[방독면]]을 생산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같은 화학무기로 대응하는 것이 가능하긴 했고, 실제로도 [[중일전쟁]] 당시 여러 번 사용했었다.''' 다만, 이는 전선이 화북과 상하이에 국한되었던 극초반의 일이고, 그 이후 전쟁 전반에 걸쳐 중국이 화학 공격을 시도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전체적인 산업 능력의 열세로 인해 방독면은 물론이고 소총도 딸랑딸랑하는 상황에서 화학 공격을 했다가 일본이 이를 빌미로 대규모 독가스 보복을 시도할 경우 이에 제대로 대응하거나 보복하는 것이 불가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전쟁 초반 이후로 화학공장을 포함한 주요 공업 지대인 동부 해안이 일본군에 넘어가버리자, 중화민국은 화학무기로 대응하는 대신 일본의 [[국제법]] 위반을 규탄하여 외교적 우위를 점하고 열강의 지원을 받아내는 방식으로 선회했다. 다만 그 이후로도 [[윈난성]] 안닝시에 위치한 주요 포탄 생산 공장인 제21병공창을 중심으로 [[백린탄]]과 화학제를, [[쓰촨성]] 루현시의 제23병공창과 [[구이저우성]] 쭌이시의 제42병공창에서는 [[방독면]]을 지속적으로 생산했다. [[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tena02&logNo=221737489531&referrerCode=0&searchKeyword=독가스|#]] 대전차전 능력도 매우 부실했으므로, 일본군이 1920~30년대 기준으로 제작한 기갑장비로도 전선 돌파가 충분히 가능했다. 이 때문에 돌격시 보병을 지원해야 할 기갑부대 역시 이 시대 수준에서 끝났다. 이것이 훗날 일본군이 진짜 강력한 상대와 교전시 교환비가 커지는 원인이 된다. 소련이나 독일 등 타 국가들은 돌격시 기관총이나 화포를 활용한 지원도 지원이지만 진짜 전선 돌파용 무기인 기갑장비가 충실했던 반면, 일본은 [[중일전쟁]]의 [[관동군]] 정도가 그나마 장비가 주어졌고, 그마저도 [[무기대여법]]으로 왕창 공여된 소련의 기갑전력에는 열세인 상태였다. 여기에 정신력 교리까지 합쳐져서 그야말로 자살이나 다름없는 짓이 된 것이다. 즉, 일본군은 전선 돌파용으로 독가스와 기갑장비를 사용했지만 독가스의 경우, 미국은 충분히 화학전을 벌일 능력이 되므로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 상황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에 대미전에서는 사용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중일전쟁]]에서 화학무기를 신나게 썼지만 ABCD 조약 연합군과 싸웠던 [[태평양전쟁]]에서는 영혼까지 털리는 와중에도 오히려(!) 화학무기를 쓰지 않았다. 한 술 더 떠서 일선부대들에 배치된 화학무기를 스스로 회수하면서 화학전 빌미를 주지 않으려고 했다. 사실 구체적으로는 화학전이 개전되도 연합국 측은 화학전에 대한 보호수단이 충실했고 더 강력한 화학무기들의 투사가 가능했지만 일본군은 보통 수준의 화학무기에 대 화학전에 대한 보호대책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미, 영, 호주, 네덜란드군 포로에게 온갖 인체 실험과 식인을 일삼했던 일본제국군의 실체를 떠올릴 때 이런 이성적인 대처는 매우 아이러니하다. 기갑장비의 경우 [[치하|현실에 안주하느라 1920~30년대 수준]]에서 멈췄다. 결국 마지막으로 남은 게 그냥 [[알보병]]의 돌격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화포와 기관총을 이용해서 제압하자니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1차 세계 대전 당시에도 화포나 기관총은 어느 나라나 있었지만 결국 전선 돌파용으로 전차가 만들어졌듯이 총포만으로 진지를 구축한 적을 격퇴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거기다가 [[백병전]] 상황을 굳이 강요하려면 [[소총]]보다는 [[기관단총]]이나 [[산탄총]], 하다못해 [[카빈|단축형 소총]] 등 [[근접전]]에서 유용한 무기를 잘 활용해서 피해나마 최대한 더 늘리려는 시도가 있어야 하는데, 일본군은 그런 노력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건 일본군이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이 핀란드군의 [[KP/-31|수오미]]에 당했던 것처럼 근접전에서 피본 상황을 겪은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김상옥]] 선생의 쌍권총으로 근접전에서 일본군은 큰 피해를 본 적이 있지만, 조센징의 테러라며 교훈을 얻기는커녕 잊어버리기 급급했다. 게다가 여기서 피를 본 경찰은 [[오사카 고스톱 사건|육군과 대립하는 관계]]라서 이런 경험을 공유해줄 리가 만무했다. 또 1차대전 당시 [[참호전]]을 직접적으로 겪거나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칭다오 공략전의 경우 사실상 완전한 화력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각종 반자동 소총, [[톰슨 기관단총]], [[M1911]], [[산탄총]] 등 근접전에서 아주 유용한 무기들을 훌륭하게 써먹은 미군과의 전투에서 환상적으로 박살나면서 일본군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해서 대전 후반쯤 가면 [[100식 기관단총]]을 보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것도 공정부대나 해군 육전대 등, 특정 부대 한정이라는 게 대다수였다는 것. 소총은 난데없이 잘 쓰고있던 38식 소총을 냅두고 사용탄이 다른 99식 소총을 혼용해 보급라인을 꼬아놓아가면서까지 교체하면서 기관단총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고 발악하진 않았다. [[남방작전]] 당시의 일본군의 [[기관단총]] 부족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일본군은 인도네시아의 팔렘방 유전을 방어하는 네덜란드군을 공략하기 위해서 공수작전을 펼쳤는데, 100식 기관단총의 보급이 딸리는 관계로 팔렘방 전투 이전에 격파한 연합군에게서 노획한 톰슨 기관단총을 지급하거나, 심지어는 [[권총]] 1자루 주는 경우가 있을 정도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무장 상태가 열악하긴 했지만, 무엇보다도 공수작전 자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중 [[공수부대]]가 들이닥쳤기 때문에 성과는 분명 거뒀지만, 일본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다. 어떻게든 그나마 미군에게 피해를 준 대전 말기 반자이 돌격을 굳이 찾아보자면 사이판 전투의 1944년 7월 6일에 벌어졌던 습격(The Raid)를 찾을 수 있다. 당시 3,000여명 가량의 대규모 일본군 부대가 최후의 옥쇄 돌격을 시행했고 미군의 허술했던 방어와 경계를 뚫고 나름대로 미군에게 꽤 큰 피해를 입혔었다. 영상에서는 날이 밝았을 때 옥쇄 돌격을 한 걸로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새벽에 습격이 벌어졌다. 다만 이 그나마 성공한 습격에서도 일본군은 3,000명 전원이 사망한 반면, 미군의 사망자는 500명 가량으로 교환비는 6:1, 다만 3,000여명의 일본군에 맞선 것이 미군 2~3개 대대 뿐이였던 데다가 영상에서도 체험할 수 있듯 파리 떼마냥 몰려오는 일본군의 돌격에 당시 미군들의 심리적 충격이 엄청났다고 한다. 총검돌격을 했으니 당연히 전투 후 상대의 사상자 대다수가 총검에 발생했음에도 이를 보고받고 '성과가 있다'로 판단해 이에 고무된 상부에서 더욱 권장했고, '성과가 없다'면 부사관들이 군기가 빠졌다며 병사들을 두들겨 팬 뒤 지휘관은 '지난번엔 실패했으니 이번엔 애들이 바짝 정신차려서 제대로 하겠지'하는 마인드로 대충 넘기며 또 돌격을 지시하는 패턴의 무한반복에, 전쟁이 중후반으로 접어들면 일선 병사들은 보급이 모자랐고 영양상태도 아주 나빴는데 "이렇게 굶어죽을 바에는 쟤랑 함께 죽자"라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제히 "반자이!"를 외치며 기합을 넣고 [[총검]], [[군도(도검)|군도]]를 앞세워 돌격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이미 체력이 한계에 달하고 피로가 극에 달해 지친 상태였으니, 아무리 기합을 넣고 백병전을 시도해도 [[에어맨을 쓰러뜨릴 수 없어|미군을 쓰러뜨릴 수가 없었다]]. 여기에 일본군이 [[아리사카]]를 들고 [[근대 총검술|근대식 총검술]]로 덤비면 미군은 반자동 소총에 착검후 장전하고 [[권총]], [[산탄총]], [[기관단총]], [[화염방사기]] 등의 다양한 화기와 역시 [[냉병기]]인 필리핀식 [[마체테]]인 볼로와 [[블랙잭#s-1|블랙잭]]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가며 맞섰다. 미군 병사들은 볼로와 블랙잭을 매우 좋아했다고 하며, 블랙잭으로 주물럭 고기 두들기듯 일본군 병사들을 다져버린 사례도 있다. 게다가 미군은 [[남북전쟁]]이나 [[의화단 운동]], 그리고 치열한 참호전이었던 1차대전을 통해 지독하고 처참한 백병전을 하도 겪다 보니 잘 정립된 [[총검술|현대식 총검술]]과 [[나이프 파이팅]]은 물론이고 [[권투]], [[레슬링]], 그 외 더럽지만 매우 효율적인 싸움법들을 정식으로 교육받았다. 당시 교육필름에서는 낭심 차기, 촛대 까기, 군화 뒷굽으로 발등 찍기, 엄지로 눈 후벼파기 등 이기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 기술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며, 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병사들을 위해 '가장 훌륭한 병사는 살아서 계속 적을 죽이는 병사'임을 수차례 강조한다. [youtube(tGHxMXgw2Do)] 미 육군의 1943 영상으로, 백병전은 그냥 막싸움이나 다름없고, 어떤 방식으로든 적을 죽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분 50초대를 보면 적에게 총검으로 덤비다가 권총에 역습당해 쓰러지는 걸 보여주며 총이 필요할 때는 총을 쓰라고 말하기도 한다. 육군에선 총검술이 사라지고 있지만 미 해병대는 신병훈련코스에 총검술이 포함되며, MCMAP 단증 따기를 적극 장려하며, 총검술도 비중은 낮지만 포함된다. 대검도 살상능력을 주안점으로 개발된 Ka Bar가 아직도 쓰인다. 물론 소위 다목적 나이프보다 오히려 더 유용한 이유도 있다. 또한 지정사수소총에도 굳이 착검돌기가 달렸다. 덤으로 깡다구 있는 대공황 세대라 기본적인 주먹질은 할 줄 알던 경우가 많아, 가르친 걸 흡수도 활용도 잘 했으며, 병사간의 교육도 활발했다. 이러니 어떻게든 운 억세게 좋게 총알 한 발 안맞고 자기들이 상상했던 대로 맞붙어도 이지선다 뿐이기에 다지선다로 솜씨좋게 덤벼오는 [[미군]]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미 해병대는 이미 의화단 사건 이후 격투술과 총검술을 다듬고 집중적으로 교육시켰다. 일본군의 반자이 돌격은 전술적으로는 거의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만, 일선의 미군들이 비상식적인 돌격을 되풀이한 일본군에게 적개심과 공포심을 품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같은 인간이 승산도 없는 싸움에 나 죽여주쇼 하면서 돌진하는 광경은 본능적인 공포감을 불러 일으켰는데, [[더 퍼시픽]]에서는 이걸 잘 묘사했다. 문제는 이 때문에 일본군의 광기를 이해하지 못한 미군 병사들은 일본군의 바람대로 반자이! 한 마디만 들어도 떨어서 사기를 잃기는커녕 반대로 "야아, 저 개새끼들 또 온다. 저놈들 놔두면 다음엔 또 무슨 미친 짓을 할지 모른다!"며 더욱 더 확실하게 일본군을 쓸어버렸다. 특히 총포 관련 에피소드는 [[과달카날 전역]] 당시 [[과달카날 전역#s-4.1|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런 일본군의 공격에 시달릴 대로 시달린 미군이 똑같은 마인드로 '너 죽고 나 죽자'며 상당한 피해를 각오하고 과달카날 전투에서 반자이 돌격을 본딴 육박전 공격을 펼친 적이 있었는데, 매번 착검 돌격을 구사해서 본인들도 돌격질에 철저하게 대비할 줄 알았던 일본군은 미군의 제대로 된 착검돌격과 빵빵한 M2 기관총, M1919, BAR과 화염방사기에 싹 전멸했다. 상기된 미군과 일본의 차이가 복합되어 나타난 결과로, 이는 때와 장소를 안 가리는 일본군과는 달리 적이 가장 취약할 새벽대를 노렸고, 일본군은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가 이런 작전을 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며, 피골이 상접해서 제대로 싸울 상황이 아니었다. 그리고 1943년 11월의 [[타라와 전투]]에서 궁지에 몰린 일본군 병사들이 좌초한 [[수송선]] 잔해에 숨어서 공격을 퍼붓자 미 해병대 1개 소대가 폭탄을 몸에 묶고 뛰어들어 수송선을 부순 적도 있었다. 결국 이 병력은 거의 전원 전사했다. 이에 대한 일설에 의하면, 일본군은 전선에 투입되기 전에 '미군은 겁이 많아서 오직 원거리 사격만 한다는 교육을 받았는데 정작 미군들이 돌격하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소련군도 [[독소전쟁]] 초기엔 [[대숙청]]으로 일본군처럼 전술의 격차를 무지막지한 인력으로 메웠고 큰 인명 피해를 봐야 했다. 다행히 미국이나, 영국 등 다른 연합국이 독일의 한쪽 팔을 잡아주던 형국이었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그나마 사람 보는 눈은 좀 있고, 부족하더라도 최소한의 상식은 있어 빠르게 숙청된 장교들을 복직시키고, [[게오르기 주코프]] 등 능력 있는 지휘관을 적절히 기용하며 지휘관들의 의견도 그럭저럭 잘 들어줬다. 일본군이 황당한 아집을 부하 탓만 돌리며 밀어붙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된다. 독소전 초기 모스크바까지 밀리는 데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여 장군들에게 일정 부분의 지휘권을 인정해 주었고, 이후 독일의 공세를 막아내자 한 번 나서볼까하다가 또 한번 털리면서 전쟁에서의 직접적인 간섭을 전쟁이 끝나갈 때까지는 참았다. 스탈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당시 소련의 인재층의 능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며 만들어진 우수한 무기와 개선된 전략전술로 질이 뒷받침되는 숫적 우세를 앞세워서 독일군을 [[쓰나미]] 앞의 조각배 신세로 만들었으나, 일본군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소련군처럼 패배를 반면교사로 삼지도 않았고, 우수한 무기도 없었으며, 전략전술을 개선할 생각조차 없었으니 그냥 [[답이 없다]]. 이쪽은 2차대전 말로 가면 기갑, 차량은 생산량이 오히려 늘어나며 찍어내는데 보병은 전쟁 내내 소모가 누적된 데다가 [[나치 독일]]의 민간인 대학살 정책으로 징집할 청년이 없어 결과적으로 연합군 중 미군 다음으로 기계화가 잘된 군대가 됐다는 웃픈 상황이 되었다. 이건 영국군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는 독일하고 전쟁 때문에 영국 본토와 아프리카 식민지에 신경쓰느라 태평양 식민지 군대를 지원하기 힘들어서 밀렸지(그나마도 대부분은 영국군의 자멸이었다.), 전쟁 후반부에도 일본군 최정예를 2선급 부대로 맞서는데도 화력부터 열세인 데다가 [[마틸다 II]] 보병전차가 쓰러지지 않아서 밀렸다. 마틸다 II 전차는 초창기 영국군의 주력 보병전차답게 전면 장갑 75mm, 측면 장갑이 70mm로, 대전 초기 기준으로썬 심히 단단하여 변변한 대전차포라고는 [[PaK 38]] 정도밖에 없던 당시 독일군은 [[8,8cm FlaK]]이나 그걸 올린 [[6호 전차 티거|티거]]쯤을 가져와야 겨우 상대할 수 있었다. 더 장갑이 얇은 [[스튜어트 전차|M3 스튜어트]]를 상대로 쩔쩔맸던 일본군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간신히 육박전을 벌일 거리까지 다가와도 이를 대비해 전투종족인 [[구르카]]를 세워 놨--으며, 실제로 싸우지는 못했지만 [[잭 처칠|2차 대전에 등장한 진짜 검객]]도 있었--다. 전쟁 최후반부라서 별로 부각은 안 되지만, 소련군을 상대할 때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이때는 일본치고 이례적인 대형 요새포들이 포격 지원을 해 주긴 했으나, 잘 무장한 엄청난 수의 병력과 T-34-85 등 강력한 기갑부대의 기동전으로 일본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김영옥(군인)|김영옥]]이 지휘했던 [[일본계 미국인]] 2세로 구성된 미군 부대 제442보병연대 제100보병대대(442nd Infantry Regiment, 100th Infantry Battalion)는 유럽 전선에서 반자이 돌격을 한 적이 있다. 프랑스 비퐁텐(Biffontaine)에서 당시 소대장이었던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독일군 기관총좌에 돌격하다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이에 분노한 소대원들이 반자이를 외치며 돌격, [[독일군]] 기관총좌를 박살냈다. 다행히 김영옥은 가벼운 부상만 입은 덕분에 쓰러진 자리에서 수류탄을 던지며 부하들의 돌격을 지원했다고 한다. 아무튼 이 사건 이후 한동안 100대대는 유럽의 미군들 사이에서 꽤나 유명해졌다. 이 돌격은 유럽 전선에서 실행된 유일한 반자이 돌격으로 현재까지도 회자되고 있지만, 사실은 김영옥과 그의 상관이 100대대가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던 중 독일군 기관총좌가 기습적인 사격을 가하자 상관이 무턱대고 착검돌격을 지시했고, 결국 대원들이 공격한 물체는 나무 울타리에 불과했다고. 분명 김영옥의 회고록에도 적혀 있다. 김영옥이 수류탄을 들고 돌격하던 걸 보고 울컥했다는 했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며, 정확히 말하자면 돌격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 판단한 김영옥이 혼자 몰래 기어가 수류탄을 까 넣은 것이다. 기관총 진지를 교란시키고 그 사이에 적은 인원이 기어가 수류탄을 까넣는 건 1차대전 초기는 물론 이전에도 있었던 상식적으로 누구나 시도할 전술이다. 일본계 미군의 유럽에서의 첫 총검 돌격이라 대서특필하여 군과 민간의 사기진작을 목적으로 미국 언론에서 이를 대서특필한 것이고, 실제로 효과도 있긴 했지만 돌격 자체는 전술적으로는 실패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